회사 근처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다. 단독 사용가능한 한강뷰 옥상을 보유한 집!
문제는 월세였다.

월세와 관리비를 합치면 상당히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좋긴 한데 너무 비싸다” 하고 포기했을 가격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친구의 에어비앤비에 놀러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집은 단순히 비싼 소비가 아니라, 방 한 칸을 현금흐름으로 바꿔볼 수 있는 실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시작한 에어비앤비 운영이 어느덧 약 3년이 됐다.

결과적으로 이 실험은 꽤 현실적인 의미가 있었다. 2025년에는 숙소 운영으로 월세의 약 70% 안팎을 보전할 수 있었다. 월세를 줄이기 위해 시작한 일이 실제로 생활비 구조를 바꿔준 셈이다.

하지만 3년이 지나고 보니, 이 경험에서 남은 건 숫자만은 아니었다.

나는 생활 속에서 사업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고, 직접 실행했고, 고객을 만나고, 문제를 해결했고, 어느 순간 이 일을 계속 키우기보다 다음 실험으로 넘어가고 싶어 하는 나 자신도 발견했다.

비싼 집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상상

처음부터 거창하게 숙박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출발점은 훨씬 생활에 가까웠다. 회사 근처에 마음에 드는 집이 있었고, 나는 그 집에 살고 싶었다. 다만 월세가 부담스러웠다.

늘 부업과 사업에 대한 갈증도 있었다. 이런저런 공부는 했지만, 실제로 꾸준히 수익을 만든 경험은 많지 않았다. 에어비앤비는 그 갈증을 현실로 옮겨볼 수 있는 꽤 구체적인 기회처럼 보였다.

외국인이 온다는 점도 두렵기보다 기대됐다. 대학 시절 영어회화를 공부하면서 영어가 내 인생의 기회를 넓혀줄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영어를 실전에서 써볼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다.

비싼 집, 부업에 대한 갈증, 외국인과 영어에 대한 기대.

이 세 가지가 맞물리자, 이사는 단순한 주거 이동이 아니라 하나의 실험처럼 느껴졌다. 계약하고 이사가기 전 2-3개월 동안 꽤 설렜던 기억이 난다.

시작 전에 걱정했던 것들

걱정했던 건 크게 다섯 가지였다.

외국인관광 도시민박업 등록 같은 법적 절차, 집주인과 계약 문제, 방을 어떻게 꾸밀지, 첫 게스트가 오기 전의 불안감, 그리고 내 집을 타인과 공유한다는 심리적 부담.

법적 절차나 계약 문제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안 되면 그냥 혼자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 내가 살고 싶은 집이었고, 에어비앤비는 그 집을 감당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실패하더라도 감당 가능한 리스크라고 판단했다.

오히려 막막했던 건 방을 꾸미는 일이었다. 평소에도 내가 인테리어 감각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방에 정말 손님이 올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런데 첫 예약이 들어왔다.

그때는 정말 “진짜 되는구나” 싶었다. 머릿속으로만 계산하던 일이 실제 예약 알림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전까지는 비싼 집을 계약한 사람의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었지만, 첫 예약 이후에는 하나의 작은 사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예약이 많이 찬 달에는 계획했던 것처럼 월세의 상당 부분을 보전할 수 있겠다는 감각이 생겼다. 단순히 부업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내 생활비 구조가 실제로 바뀌고 있었다.

방 한 칸이 만든 낯선 연결들

운영하면서 가장 의외였던 건 외국인 게스트들이 생각보다 사교적이라는 점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낯선 사람이 “오늘 하루는 어땠어?”라고 물어보는 날들이 생겼다. 한국인 게스트들은 보통 간단히 인사만 하고 각자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외국인 게스트들과는 짧게라도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우리 숙소의 가장 큰 장점은 새 건물이나 화려한 인테리어가 아니었다. 구축 주택이지만, 방과 옥상에서 느낄 수 있는 탁 트인 풍경과 조용한 동네 분위기가 있었다.

길이 조금 복잡해서 게스트가 찾아올 때 볼 수 있는 비공개 안내 영상을 만들어 공유했는데, 이런 작은 운영 디테일에 대한 반응도 좋았다.

기억에 남는 게스트들도 있다.

1년에 여러 번 한국에 와서 우리 숙소를 이용했던 일본 손님이 있었다. 숙소 운영자 입장에서 재방문은 가장 직접적인 신뢰의 표시처럼 느껴졌다. 내가 만든 공간이 누군가에게 “다시 오고 싶은 곳”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드론을 가지고 다니며 세계여행 중이던 독일 부부도 기억난다. 어떤 게스트들과는 같이 한강에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월세를 줄이기 위한 실험으로 시작했지만, 운영을 하다 보니 이 일은 단순히 방을 빌려주는 일이 아니었다. 내 공간을 통해 낯선 사람들과 얇지만 실제적인 연결이 생겼다.

숫자가 만들어지는 현장에 들어가다

회사에서는 보통 고객을 직접 만나기보다, 각 접점에서 발생한 데이터가 모인 숫자를 보고 전략서를 만드는 일을 한다.

그런데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면서 그 숫자가 만들어지는 접점에 직접 들어가게 됐다.

예약 문의에 답하고, 길을 못 찾는 게스트를 도와주고, 도어락 문제를 해결하고, 청소 상태를 점검하고, 후기를 받았다. 데이터로만 보던 고객 경험이 실제 생활 안으로 들어온 셈이었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내가 이런 일이 더 맞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직접 고객을 만나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고, 서비스가 작동하는 장면을 보는 일에는 분명한 재미가 있었다.

청소도 생각보다 감당 가능한 일이었다. 미리 준비만 해두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면 끝낼 수 있었다.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면서 공용공간과 게스트룸을 항상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게 된 점은 장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운영은 언제나 좋은 장면만 남기지는 않았다.

가장 큰 비용은 프라이버시였다

3년 동안 운영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보이지 않는 비용은 프라이버시였다.

처음에는 사업적인 경험을 해보고, 새로운 외국인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장점이 컸다. 그 경험 가치는 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퇴근 후 낯선 사람과 대화하고, 영어를 실전에서 쓰고, 내 공간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이 실험을 계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각은 조금씩 무뎌졌다. 새로움이 일상이 되자, 남은 것은 내 집 안에 항상 누군가가 있다는 감각이었다.

내가 온전히 쉬고 싶을 때도 집은 완전히 내 공간이 아니었다. 친구나 가족이 서울에서 잘 곳이 필요하다고 할 때, 이미 잡힌 예약 때문에 도와줄 수 없는 순간도 아쉬웠다.

도어락을 못 열거나, 길을 못 찾거나, 화장실 문제가 생기는 식의 이슈가 생기면 개인 일정이 있어도 가능한 한 빨리 집에 가서 해결해야 했다.

이 구조는 혼자 살 때는 가능했다. 하지만 결혼하거나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되면 사실상 지속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적으로는 삶의 질을 꽤 깎을 수 있는 방식이기도 했다.

만약 다음에 다시 숙박 사업을 한다면, 같은 방식은 아닐 것 같다. 별도의 한 채를 운영하거나, 최소한 층과 출입구가 분리된 구조, 혹은 게스트 공간과 생활 공간이 명확히 나뉜 곳이어야 할 것 같다. 그 편이 운영자에게도 낫고, 게스트에게도 더 매력적인 숙소가 될 것이다.

나는 계속 키우는 사람일까, 다음 실험으로 넘어가는 사람일까

처음에는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내가 하면 계속 개선할 텐데.”

그런데 실제로 3년 가까이 운영해보니, 내가 늘 사업에 촉각을 세우고 매일 발전시키는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쯤 지나 운영이 익숙해지고, 관심이 음악 작업 같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나는 이 사업을 계속 발전시키기보다 현상 유지하고 있었다. 더 좋은 사진을 찍고, 더 좋은 안내를 만들고, 더 정교한 가격 전략을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어느 순간 그만큼의 에너지를 쓰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 경험의 의미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됐다.

나는 하나의 사업을 평생 붙잡고 계속 키우는 사람이라기보다, 직접 써보고, 운영해보고, 배운 뒤 다음 실험으로 넘어가는 사람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이 실험이 남긴 것

이 경험은 월세를 일정 수준 보전했다는 점에서 분명 중요한 성과였다. 숫자가 없었다면 이 일은 그저 흥미로운 체험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실제 현금흐름이 생겼기 때문에 이 실험은 더 진지한 경험이 됐다.

하지만 수확은 숫자에만 있지 않았다.

생활 속에서 사업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고, 직접 실행해봤다는 것. 고객 경험이 데이터가 되기 전의 현장을 몸으로 겪어봤다는 것. 그리고 어떤 현금흐름은 내 삶의 방식과 맞을 때만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그게 이 3년이 남긴 가장 큰 배움이었다.

월세가 비싸서 시작한 일은, 결국 나에게 작은 사업 수업이 됐다.

끝.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 내 모든 것 드릴 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중 -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지금 내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고, 8년 차 직장인이 되어서도 계속 음원을 내기까지 한 건 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 교실에서 열린 '천하제일 고음 무도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1학년 때만 음악과 미술 수업이 있었다.

우리 학교 음악 수업은 꽤 자유로웠는데, 뮤지컬이나 퀸(Queen)의 라이브 영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교과서 안팎의 악보를 보며 노래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겐 노래 실력이란 일종의 '전투력'이었다.

노래를 잘하면 주목받기 쉬웠고, 수련회나 축제가 다가오면 "몇 반 누구 성량이 미쳤다더라", "누가 더 높은 음이 올라간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최고의 가십거리였다. 나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는 했지만, 소위 말하는 '실력자'들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그런 관심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 수행평가를 가창 시험으로 본다는 공지가 떴다.

지정곡 리스트는 마법의 성, 비틀즈의 Yesterday, 오 샹젤리제, 사랑하기 때문에 등이었다.

그 순간 교실에서는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마치 '천하제일 무도회'가 열린 것 같았다.

노래에 자부심 좀 있다 하는 친구들은 보란 듯이 **<마법의 성>**을 선곡했다.

(내 기억으론 최고음이 3옥타브를 넘나드는, 남학생들에겐 공포와 도전의 곡이었다.)

고음 좀 된다 싶으면 <마법의 성>, 팝송 좀 안다 싶으면 <비틀즈>, 이도 저도 아니면 <오 샹젤리제>로 나뉘는 판국이었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인기 있는 선곡은 아니었다.

 

🎵 내가 '유재하'를 선택한 진짜 이유

사실 내가 이 곡을 고른 데에는 의외의 이유가 있었다.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빠지자면, 당시 나는 소녀시대, 그중에서도 제시카의 열렬한 팬이었다.

MP3에 라이브 음원을 넣어놓고 주구장창 듣곤 했는데, 당시 제시카가 R&B 버전으로 부른 <사랑하기 때문에>에 푹 빠져 있었다.

그 노래가 가장 익숙하기도 했고, 원곡의 감성에 팬심 한 스푼을 더해 나만의 느낌으로 부르고 싶었다.

아닌 척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나도 노래를 좋아하는 만큼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대고 있었던 것 같다.

 

🎵 두둥! 결전의 날

드디어 결전의 날. 음악실에는 반 아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해야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혼자 노래하는 건 처음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갔는데, 서 있는 동안 한쪽 다리가 재봉틀처럼 덜덜덜 떨렸다.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멍한 표정으로 인생 첫 무대에서 내려와 있었다.

 

모든 친구의 노래가 끝나고 점수 발표 시간. 선생님이 번호를 부르며 점수를 알려주셨다.

사실 100점이라는 점수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다. 반에서 절반 정도는 100점을 받았으니까.

'그래도 100점은 받겠지? 설마 80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선생님이 내 번호를 불렀다.

"8번 100점. ...8번 학생 참 노래 잘하더라."

선생님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지셨겠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이 멍해졌다.

평범한 학생이라 선생님은 내 이름조차 잘 모르셨겠지만, 그 '한 마디'는 내 마음속 깊이 박혔다.

노래와 음악이라는 게 어쩌면 내가 좋아하면서 잘 해낼 수 있는 '무언가'일 수 있겠다는 확신.

그날의 칭찬은 평범했던 내 인생 데이터에 찍힌 가장 강력한 '이상치(Outlier)'였다.

 

🎵 그리고 지금, 다시 부르는 노래

그 이후로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든, 군대를 가든, 취업해서 데이터를 분석하든... 그날의 기억 덕분에 나는 늘 마음 한 켠에 음악을 품고 살았다.

그 마음이 씨앗이 되어 2021년 '림보'라는 음악 모임을 시작하게 했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대중 앞에 서게 했다.

그리고 2025년에는 '민재봉'이라는 보컬 팀으로 자작곡 음원도 내고, 80명 규모의 단독 공연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때 그 선생님의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 노래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아마 지금처럼 퇴근 후 마이크 앞에 앉는 행복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떨림, 그리고 지금의 감사를 담아 오늘의 일기를 기록한다.

 

일기 끝.

원래 보통 분석할 때 Jupyter Notebook에서 많이 진행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VSCode를 처음 사용해 봤는데, 

프로젝트 디렉토리 관리, Extensions를 통한 편의성 등이 비교도 안되게 편했다.

 

다만, 로컬PC에 있는 VSCode 작업공간 내에서 .ipynb 파일을 생성해서 작업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개발 서버에 존재하는 docker container 안에 있는 jupyter notebook을 파이썬 인터프리터로 사용하지 못해

개발 서버에서 테스트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찾아보니 VScode에는 "Connect to a remote Jupyter Server" 기능이 존재한다. **참고1

여기에 실행 중인 Jupyter Notebook 주소를 넣으면 해당 인터프리터 내에 존재하는 파이썬 커널 사용이 가능하다.

(처음에 F1 단축키 누른 후,  "Notebook: Select Notebook Kernel" 선택하면 다음 버튼으로 선택 가능하다.) **참고2

 

 

※ "Connect to a remote Jupyter Server" 기능은 VScode 내에 python (또는 jupyter) Extension이

    설치되어 있어야 보이는 것 같다. 

 

※ 로컬 PC에 Docker Desktop을 설치하면 Extension을 활용해서 진행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라이선스 이슈가 걸려서 실행하지 않았다.

 

**참고

1. https://code.visualstudio.com/docs/datascience/notebooks-web#_connect-to-a-remote-jupyter-server

 

Jupyter Notebooks on the web

Working with Jupyter notebooks on the web with Visual Studio Code.

code.visualstudio.com

2. https://code.visualstudio.com/docs/datascience/jupyter-notebooks#_connect-to-a-remote-jupyter-server

 

Working with Jupyter Notebooks in Visual Studio Code

Working with Jupyter Notebooks in Visual Studio Code.

code.visual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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